
암호화폐 시장이 성장하면서 가장 뜨거운 논쟁 중 하나가 바로 '증권성' 문제입니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같은 암호화폐가 과연 주식이나 채권처럼 증권으로 규제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자산인지를 둘러싼 법적 공방이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데요. 만약 암호화폐가 증권으로 분류되면 엄격한 공시 의무와 투자자 보호 규정을 따라야 하죠. 과연 암호화폐는 증권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범주의 자산일까요?
증권이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로다
암호화폐가 증권인지 판단하는 핵심 기준은 1946년 미국 대법원 판결에서 나온 '하위 테스트'(Howey Test)입니다. 하위 테스트는 네 가지 질문으로 구성되는데요. △금전적 투자가 있는가 △공동 사업에 대한 투자인가 △이익에 대한 기대가 있는가 △그 이익이 타인의 노력으로부터 발생하는가입니다. 이 네 가지를 모두 충족하면 증권으로 분류되죠.
예를 들어 일반적인 주식을 보면 명확합니다. 투자자가 돈을 주고 회사 주식을 사면 금전적 투자가 있는 것이고, 그 돈은 회사라는 공동 사업에 투입됩니다. 투자자는 회사가 성장해 주가가 오르거나 배당금을 받을 것을 기대하며, 이러한 이익은 경영진과 직원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죠. 이렇게 네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기 때문에 주식은 전형적인 증권입니다.
문제는 암호화폐마다 성격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비트코인은 중앙화된 발행 주체가 없고 단순히 가치 저장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SEC도 증권이 아닌 상품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더리움도 초기에는 ICO로 자금을 모았지만 현재는 충분히 탈중앙화되었다는 이유로 증권이 아니라는 입장이 우세합니다. 하지만 특정 기업이나 재단의 노력에 의존하는 많은 알트코인들은 증권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죠.
ICO(Initial Coin Offering):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자체 암호화폐(토큰)를 발행해 투자자에게 팔고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입니다. 주식의 IPO와 비슷하지만, 규제와 공시 의무가 거의 없어 사기·부실 위험이 크다는 점이 핵심 차이입니다.
리플 판결이 만든 새로운 기준
암호화폐 증권 논란의 분수령은 2020년 SEC가 리플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었습니다. SEC는 리플이 XRP 토큰을 판매하면서 약 13억 달러를 모금했는데, 이것이 미등록 증권 발행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리플은 XRP가 비트코인처럼 탈중앙화된 디지털 자산이라며 강하게 반발했고, 암호화폐 업계 전체가 이 소송의 결과를 주목했죠.
2023년 7월 법원은 절묘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기관 투자자에게 직접 판매한 XRP는 증권이지만, 공개 거래소에서 일반 투자자들이 사고판 XRP는 증권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래소에서 토큰을 구매한 사람들은 리플의 노력으로 이익을 얻으리라 기대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죠. 이 판결은 암호화폐 업계에 부분적 승리로 받아들여졌지만, 동시에 판매 방식에 따라 같은 토큰도 증권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냈습니다.
테라폼 랩스, 증권 판매 책임 인정
리플 판결과 대조적으로 2024년 테라폼 랩스 사건에서는 훨씬 명확한 결론이 나왔습니다. 뉴욕 남부지방법원은 테라폼 랩스와 권도형 대표가 발행한 루나(LUNA)와 테라USD(UST)가 증권이라고 판결했는데요. 법원은 투자자들이 권 대표와 테라폼 랩스의 마케팅과 기술 개발 능력을 믿고 투자했으며, 토큰 가치 상승에 대한 기대가 명백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권 대표가 직접 나서서 UST의 안정성과 루나 생태계의 성장 가능성을 홍보한 점이 핵심 증거로 작용했죠.
테라·루나 사태: 2022년 5월 발생한 암호화폐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붕괴 사건입니다. 권도형이 설립한 테라폼 랩스는 1달러 가치를 유지하도록 설계된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 테라USD(UST)와 이를 뒷받침하는 자매 코인 루나(LUNA)를 발행했는데요. UST는 은행 예금이나 실물 자산 담보 없이 루나와의 알고리즘적 연동을 통해 가격을 유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2022년 5월 대규모 UST 매도가 발생하면서 1달러 페깅(고정)이 깨지기 시작했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루나가 무한정 발행되면서 루나 가치가 폭락했죠. 결국 UST는 몇 센트 수준으로 떨어지고 루나는 사실상 휴지조각이 되면서 약 400억 달러(약 59조 원)의 투자자 자산이 증발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수십만 명의 투자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암호화폐 시장 전체에 대한 신뢰를 크게 훼손시킨 사건으로 기록됐습니다.
판결의 핵심은 테라폼 랩스가 투자자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법원은 UST의 탈페깅 위험성과 루나 토큰의 가치 하락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경고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안정성을 과장해 투자자들을 오도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테라폼 랩스와 권 대표에게는 총 45억 달러의 민사 벌금이 부과됐죠.
탈페깅: 스테이블코인처럼 특정 가격(예: 1달러)에 묶여 있어야 할 자산이 그 기준 가격에서 벗어나는 현상입니다. 1달러여야 할 코인이 시장 불안이나 매도 폭증으로 1달러 아래로 내리거나 올라 신뢰가 깨진 상태를 말하죠.
권 대표는 민사재판에 이어 형사재판에서도 엄중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2024년 12월 뉴욕 남부연방법원은 권 대표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는데요. 폴 엥겔마이어 판사는 "피해 규모가 400억 달러에 달하는 전대미문의 사기"라며 "미 연방 기소 사건 가운데 이보다 피해 규모가 큰 사건은 거의 없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검찰이 유죄협상을 통해 12년형을 요청했지만 법원은 이보다 무거운 형량을 선고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