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제 청산, 거래소가 내 자산을 대신 파는 순간
암호화폐 투자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 중 하나가 바로 ‘강제 청산'(forced liquidation)입니다. 투자자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거래소가 내 자산을 강제로 팔아버리는 것인데요. 청산은 거래소가 손실을 통제하고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안전장치입니다. 투자자가 빌린 자산을 갚지 못할 위험이 커지면 거래소는 담보나 포지션을 자동으로 처분해 대출금을 회수하고, 손실을 더 키우지 않도록 막는 거죠.
청산이 일어나는 구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현물 시장에서 담보대출(렌딩)을 활용했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선물(Futures) 시장에서 레버리지(지렛대)를 걸었을 때인데요. 원래 현물 거래 자체는 가진 돈으로만 코인을 사고파는 구조라 청산이란 개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코인을 담보로 돈을 빌리거나, 빌린 코인으로 다른 코인을 사는 구조를 사용하면 빚이 생기고, 담보 가치가 떨어질 경우 청산이 일어날 수 있는 거죠.
반면 선물 시장은 구조 자체가 빚(레버리지)에 기반을 두고 있어 청산 위험이 훨씬 큽니다. 선물은 말 그대로 미래 가격에 ‘베팅’하는 거래인데, 거래소에 전액을 내는 대신 일부 금액(증거금)만 맡기고 훨씬 큰 규모의 거래를 할 수 있는 구조이죠. 덕분에 적은 돈으로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가격이 조금만 반대로 움직여도 증거금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청산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청산, 언제 어떻게 이뤄지는 걸까?
강제 청산이 어떤 조건에서 일어나는지 알면 시장의 위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트리거는 세 가지인데요.
1️⃣ 담보 가치 하락
비트코인을 담보로 스테이블코인 테더(USDT)를 빌렸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비트코인 가격이 급락하면 담보 가치가 떨어지고, 담보 대비 부채 비율(LTV)이 급격히 올라가는데요. 이 비율이 거래소가 정한 임계치를 넘으면, 거래소는 담보를 시장가로 팔아 대출금을 상환하는 청산을 실행합니다.
2️⃣ 부채 가치 상승
빌린 자산 자체의 가격이 오를 때도 문제가 되는데요. 테더를 빌렸는데 테더 가격이 급등하면 갚아야 할 돈이 많아지면서 LTV가 위험 구간에 들어가고, 역시 청산이 일어납니다.
3️⃣ 유지 증거금 미달
마지막으로 유지 증거금 미달은 선물(Futures)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청산 트리거인데요. 선물은 현물처럼 매수 대금 전액을 내고 실물을 사는 거래가 아닙니다. 애초에 '미래의 가격'에 베팅하는 계약이라, 계약 체결을 위해서는 전액이 아니라 일부 금액(증거금)만 맡기면 되죠.
예를 들어, 비트코인이 한 달 뒤에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1,000만 원 규모의 롱(상승) 포지션을 잡고 싶다면, 거래소에 1,000만 원을 전부 낼 필요는 없는데요. 보통 10% 수준인 100만 원만 증거금으로 맡기면 계약이 성립됩니다. 이때 증거금 100만 원만 내고 실제로는 1,000만 원 규모 거래를 하는 것이므로, 이미 10배 레버리지가 걸린 상태죠.
문제는 이 구조에서 가격이 조금만 움직여도 증거금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건데요. 예를 들어 10배 레버리지 상태에서 코인 가격이 10% 하락하면, 1,000만 원 포지션에서 100만 원 손실이 나고 증거금 100만 원이 전부 증발하게 됩니다. 이때 거래소는 손실이 증거금을 넘기기 전에 자동으로 포지션을 강제로 종료(청산)하는 거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량 매도·매수 주문이 시장을 더 흔들고, 다른 투자자들의 청산을 연쇄적으로 유발하는 ‘도미노 청산'(liquidation cascade)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현물과 선물에서 동시에 터진 청산
이번 10월 청산 쇼크에서는 이 세 가지 트리거가 동시에 작동하며 현물과 선물 양쪽에서 대규모 청산이 이뤄졌습니다.
1️⃣ 현물 시장의 빗썸 ‘테더 5,755원’ 사건
10월 11일, 국내 거래소 빗썸에서 스테이블코인 테더(USDT)가 단 몇 분 만에 1,600원대에서 5,755원까지 치솟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같은 시각 업비트(1,650원), 코인원(1,670원), 글로벌 시세(1,554원)와 비교하면 3배 이상 높은 가격이었죠.
업계는 이 급등의 원인을 빗썸의 렌딩(대여 서비스) 청산 구조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투자자가 비트코인을 담보로 테더를 빌렸는데, 테더 가격이 급등하면 거래소는 비트코인을 강제로 팔아 현금을 확보하고, 확보한 돈으로 테더를 시장가에 매수해 상환합니다. 이 시장가 매수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며 테더 가격이 밀려 올라가고, 다시 청산을 부르는 악순환이 반복된 겁니다.
2️⃣ 선물 시장, 역대 최대 27조 원 청산
앞서 선물 시장에서는 더 큰 충격이 터졌습니다. 10월 10일 하루 동안 글로벌 시장에서 청산된 선물 포지션 규모가 191억 5,600만 달러(약 27조 원)에 달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는데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희토류 수출 규제에 대응해 100% 추가 관세를 예고하자 암호화폐 가격이 급락했고, 고배율 레버리지 포지션이 줄줄이 청산된 거죠.
특히 매년 10월 암호화폐 가격이 오르는 업토버(Uptober) 현상과 연말 산타랠리에 대한 기대감에 최근 고배율 베팅이 크게 늘어난 상태였는데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으로 암호화폐 가격이 폭락하며 고배율 레버리지 포지션이 한꺼번에 무너졌고, 이 청산이 시장의 하락세를 더 가속화하는 악순환이 벌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