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의 사이는 왜 나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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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이란의 사이는 왜 나쁠까?

JAY
경제 한입2026-05-05

💡 오늘 <경제 한입>을 읽으면 아래 내용을 알 수 있어요!

  • 친미 국가였던 이란과 미국의 사이가 나빠진 이유
  • 수십 년간 이란과 미국의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진 이유
  • 2025·2026년 두 차례 전쟁이 터진 직접적인 이유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시작된 지 벌써 2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월 28일(현지 시각) 이란에 대한 전격 공습을 단행하며 "4~5주면 끝낼 수 있다"라고 자신했는데요. 하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 미국이 이번 전쟁에 쏟아부은 돈은 250억 달러(약 36조 8천억 원)에 달하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발을 빼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지만, 이란의 강경 대응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쉽지 않은 상황이죠. 오히려 이란은 이 틈을 이용해 미국에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과 전쟁 배상금까지 요구하며 협상의 주도권을 쥐려 하는데요. 두 번의 전쟁으로 핵 시설이 무너지고 최고지도자까지 잃었지만, 이런 과정에서 이란이 더 단단한 군사 국가로 거듭나고 있다는 평가까지 나옵니다. 도대체 두 나라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요? 오늘 <경제 한입>에선 그 70년 악연의 흐름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친미국가였던 이란, 70년 앙숙된 이유는?

🛢️ 1953년: 이란의 석유 국유화 선언과 군사 쿠데타

1951년, 이란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그는 영국이 독점하던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전까지 이란은 영국과 석유 자원을 공동 개발했는데요. 하지만 영국 기업이 수익의 대부분을 가져가면서 이란 내부에선 불만이 빠르게 쌓여갔습니다. 실제로 영국 석유 회사의 이익이 이란 정부 전체 수입보다 많을 정도였기에, 국민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식민지와 다를 바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죠.

이란 정부의 국유화 선언에 영국 정부는 발칵 뒤집혔고, 곧바로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에 나섰습니다. 마침 당시는 미국과 소련이 한창 대치하던 냉전 시기였는데요. 미국은 이란이 소련 쪽으로 기울 것을 우려해 영국과 손을 잡았고, 1953년 이란의 군부 쿠데타를 함께 지원했습니다. 결국 모사데그가 축출되고, 친서방 성향의 팔레비 왕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됐죠.

영국과 미국은 어떻게 군부 쿠데타를 지원했을까?

영국은 이란의 석유 판매를 봉쇄하며 경제적 압박을 키웠고, 이를 통해 내부 불만을 키웠습니다. 동시에 CIA는 언론과 정치 세력, 시위 등을 지원해 반정부 여론을 확산시키며 혼란을 일으켰죠. 이렇게 조성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군부를 움직여 결국 쿠데타로 모사데그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미국 입장에선 소련을 견제하고 중동을 안정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란인들이 본 풍경은 전혀 달랐습니다. 직접 뽑은 총리가 외국 정보기관 손에 쫓겨난 셈이기 때문인데요. 이때부터 이란인의 마음속에 미국에 대한 강력한 반발심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 1953~1979년: 친서방 국가가 된 이란

지금의 이란을 떠올리면 잘 안 믿기지만, 팔레비가 다스리던 25년간 이란은 중동에서 가장 서구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나라였습니다. 팔레비는 백색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강력한 서구화·세속화 정책을 밀어붙였는데요. 테헤란 거리에서는 젊은이들이 미국 팝송을 흥얼거렸고, 여성들은 미니스커트와 청바지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백색 혁명: 팔레비가 1963년부터 추진한 개혁으로, 토지개혁·여성 참정권 확대·교육 확대 등을 통해 이란을 빠르게 현대화·서구화하려는 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 세력과 전통 계층의 반발을 키우며 사회 갈등을 심화시켰고, 훗날 1979년 혁명의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미국과의 관계도 끈끈했습니다. 1972년에는 닉슨 대통령이 직접 테헤란을 방문했고, 이란은 미국 무기 구매의 큰손이 됐죠. F-14 전투기를 비롯해 1970년대 후반까지 사들인 미국산 무기만 약 160억 달러어치, 지금 환율로 약 23조 원 규모였습니다. 미국 석유 회사도 잇따라 이란에 진출했죠.

하지만 이란 사회는 내부적으로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서구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보수 종교계는 이란의 이슬람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데요. 한편, 석유 판매로 이란 정부는 큰돈을 벌었지만 혜택은 상류층과 왕 주변에 집중됐고, 물가 상승과 빈부 격차로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졌죠. 여기에 팔레비 정권이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동원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한다는 사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미국 내에서도 이란 정권을 계속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커졌습니다.

 

🕌 1979년: 혁명, 그리고 444일의 인질극

쌓이고 쌓이던 불만은 결국 폭발했습니다. 1979년 2월,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정이 무너지고 이란이슬람공화국이 들어섰는데요. 호메이니는 사회 각계에서 나온 불만을 왕정 타도와 이슬람 국가 회복이라는 공통된 방향으로 묶어냈죠. 그 결과, 이란은 빠르게 서구화된 사회에서 종교 중심 사회로 방향을 틀게 되고, 호메이니는 대통령보다도 강한 권한을 가진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최고지도자: 이란의 최고지도자는 국가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인물로, 대통령보다도 위에 있는 실질적 최고 권력자입니다. 사법부·국영방송·혁명수비대 등 핵심 기관을 직접 통제하며, 외교·안보 같은 국가의 큰 방향을 최종 결정하는데요. 종교적으로도 이슬람 체제의 수호자 역할을 맡는, 정치와 종교 권력을 동시에 가진 자리입니다.

여기까지였다면 미국과의 외교 관계도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카터 행정부의 한 가지 결정으로 인해 이란과 미국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는데요. 축출된 팔레비가 췌장암 치료를 이유로 미국 입국을 요청했고, 카터가 이를 받아들인 겁니다. 이란은 이를 단순히 인도적 조치로 보지 않았습니다. 1953년 군부 쿠데타 당시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다시 이란 정치에 개입하려는 신호로 받아들였던 거죠.

그러던 1979년 11월 4일, 이란 학생 시위대가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직원 90여 명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이들은 여성과 흑인을 제외한 52명을 인질로 삼고, 팔레비를 당장 이란으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죠. 카터 대통령은 1980년 4월 특수부대를 투입해 구출 작전(이글 클로 작전)을 벌였지만, 헬기 고장과 악천후로 작전이 실패하면서 미군 8명이 숨지고 4명이 다치는 참사로 끝났습니다. 이 실패가 카터의 재선 패배에도 결정적 타격을 입히기도 했죠.

인질들이 풀려난 건 무려 444일 만이었습니다. 그것도 카터의 후임인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 날이었는데요. 카터에게 끝까지 굴욕을 주려는 이란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었죠.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1980년 끊긴 외교 관계는 지금까지 46년째 이어집니다. 양국은 그때 이후로 정상적인 외교 통로 없이 스위스나 오만, 카타르 같은 제3국을 거쳐서만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습니다.

 

제재와 충돌이 반복된 30년

💰 1980~90년대: 끝없는 제재의 시작

인질 사건 이후 미국은 본격적으로 이란을 옥죄기 시작합니다. 카터 행정부는 미국 내 모든 이란인의 자산을 동결했고, 1984년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을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했죠. 1987년에는 이란산 제품 수입을 전면 금지했고, 1995년 클린턴 행정부는 한 발 더 나아가 이란과의 무역·금융 거래 자체를 통째로 막아버렸습니다.

위기감이 더 높아진 사건도 있습니다. 8년간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 중이던 1988년 7월, 페르시아만에 있던 미 해군 순양함 빈센스호가 이란 민항기 655편을 군용기로 잘못 알고 격추해 승객 290명이 모두 숨지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란 내부에서는 미국이 사실상 전쟁 당사자와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 굳어졌고, 반미 감정도 한층 더 깊어지게 되죠.

이란-이라크 전쟁: 1980년, 사담 후세인이 이란 혁명 이후의 혼란을 틈타 이란을 침공한 전쟁입니다. 이란과 이라크는 8년간 치열한 소모전을 벌였고, 미국과 서방은 사실상 이라크를 지원하는 등 국제전 양상으로 번졌는데요. 1988년, 전쟁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만 남긴 채 끝났고, 이란이 전면전 대신 대리전 전략을 강화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 시기 이란은 중동 곳곳에 자기편 무장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는데요. 이게 바로 헤즈볼라, 하마스 등이 속하는 저항의 축입니다. 이후 30년간 미국-이란 갈등은 이 대리세력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부딪히는 식으로 흘러갔습니다.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 혁명 이후 이란이 미국·이스라엘과 정면충돌하는 대신 키워온 친이란 무장세력 네트워크입니다. 레바논 헤즈볼라, 팔레스타인 하마스, 예멘 후티,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 등이 여기 속하는데요. 이란이 자기 영토 밖에서 미국·이스라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핵심 수단이었지만, 2023~2024년 이스라엘의 공세로 지도부가 줄줄이 무너지면서 많이 약해졌습니다.

 

🎯 2002~2005년: 악의 축, 그리고 핵 의혹의 등장

2002년 1월, 9·11 테러가 일어난 직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이란을 북한·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 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같은 해 이란 반정부 단체가 "이란이 몰래 우라늄 농축 시설(나탄즈)이랑 중수로(아라크)를 짓고 있다"라고 폭로하면서, 핵 개발 의혹이 갈등의 새 중심으로 떠올랐죠.

이란은 평화적 목적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서방은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2005년 강경 보수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우려는 더 커졌는데요. 미국은 이란의 금융 부문과 석유 거래를 직접 노리는 제재로 돈줄을 옥죄기 시작했죠. 이때부터 미국-이란 갈등의 핵심 주제가 체제(이슬람 공화국이냐, 친미 정권이냐)에서 핵 보유 여부로 옮겨갑니다. 이후 모든 협상은 핵을 중심으로 이뤄지게 됩니다.

 

🤝 2015년: JCPOA, 36년 만의 봄날

오랜 갈등 끝에 잠깐 숨통이 트이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적성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던 오바마 행정부가 앞장서서, 2015년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독일과 이란이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 이라는 합의를 맺은 건데요. 이란의 우라늄 농축도를 3.67% 이하로 묶고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을 받기로 하는 대신, 국제사회가 제재를 풀어주는 거래였습니다. 1979년 이후 36년 만에 양국 관계가 처음으로 풀리는 순간이었는데요. 족쇄 풀린 이란이 중동의 강국으로 단숨에 발돋움할 것이란 전망이 쏟아졌고, 유럽 기업도 줄지어 테헤란을 찾아갔죠. 하지만, 이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우라늄 농축: 자연 상태의 우라늄에서 핵분열이 잘 일어나는 우라늄-235의 비율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입니다. 원자력 발전용은 3~5%, 연구용 원자로는 약 20%, 핵무기용은 90% 이상이 필요한데요. 2025년 5월 기준 이란은 60%까지 농축한 우라늄을 400kg 넘게 갖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무기 수준 바로 직전 단계까지 와 있던 셈이죠.

 

💣 2018~2024년: 합의 파기, 솔레이마니, 그리고 흔들리는 이란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임기 중에 JCPOA를 일방적으로 파기했습니다. 트럼프는 "이란 핵 합의는 역대 최악의 거래"라고 깎아내렸고,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으로 이란 원유 수출을 0으로 만들겠다"라며 강도 높은 제재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동시에 이란의 숙적인 이스라엘과는 더욱 끈끈해졌는데요. 이란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우라늄 농축 수준을 단계적으로 올리며 사실상 합의에서 발을 뺐죠.

긴장이 정점을 찍은 건 2020년 1월이었습니다. 이란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이자 사실상 이란 군부의 2인자였던 카셈 솔레이마니가 미군 드론 공격으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숨졌는데요. 이란은 곧바로 이라크 미군 기지에 미사일을 쏘며 보복했고, 양국 모두 한 발씩 물러나서 간신히 전면전은 피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024년 5월, 하메네이의 든든한 지원을 받던 보수 강경파 대통령 에브라힘 라이시가 헬기 사고로 갑자기 목숨을 잃었습니다. 곧바로 치러진 보궐 선거에선 의사 출신의 온건 개혁파 마수드 페제시키안이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죠. 페제시키안은 서방과의 대화 재개에 의지를 보였지만, 보수 진영의 견제와 미국의 강경 노선 사이에 손발이 묶였습니다.

같은 해 헤즈볼라와 하마스 지도부가 이스라엘에 의해 줄줄이 제거되면서, 이란이 30년 넘게 공들여 키운 '저항의 축'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란 입장에선 협상 카드도 잃고, 보복 카드도 잃은 셈이었죠. 그리고 2025년 1월, 트럼프의 재선으로 이란 위에 드리운 그림자는 더 짙어졌습니다.

 

마침내 터진 직접 충돌

🛩️ 2025년 6월: 미드나이트 해머와 12일 전쟁

이렇게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긴장은 결국 직접 충돌로 터졌습니다. 2025년 6월 13일,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 시설, 미사일 시설, 군 지휘부를 한꺼번에 기습 공격하면서 12일 전쟁이 시작된 건데요. 이스라엘은 이란 핵 과학자 십수 명을 암살했고, 군 수뇌부도 여럿 제거했습니다.

문제는 이란 핵 시설의 심장인 포르도 핵시설이 산속 깊은 지하에 있어서 이스라엘 무기로는 도무지 파괴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직접 개입을 강하게 압박했고, 결국 6월 22일 미국 공군과 해군이 '미드나이트 해머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포르도, 나탄즈, 이스파한 세 곳의 핵 시설을 공격했는데요. B-2 스텔스 폭격기가 14발의 벙커버스터(GBU-57)를 떨어뜨렸고, 잠수함에서는 토마호크 미사일이 날아갔죠.

포르도 핵시설: 이란의 대표적인 핵시설로, 산속 깊은 지하에 건설돼 외부 공격에도 견디도록 설계된 우라늄 농축 시설입니다. 국제사회에서는 핵무기 개발 가능성과 관련해 강한 의심을 받아왔으며, 이란 핵협상의 핵심 쟁점 중 하나로 꼽혀 왔습니다.

벙커버스터(GBU-57): 미국이 갖고 있는 13.6톤짜리 거대한 폭탄입니다. 지하 60m 깊이의 콘크리트 벙커까지 뚫고 들어가서 터지도록 만들어졌는데요. 이란 포르도 핵시설처럼 산속 깊이 묻힌 목표물까지 파괴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재래식 무기로, 이를 운반할 수 있는 B-2 스텔스 폭격기 역시 미국만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란은 카타르의 미군 기지에 미사일을 쏘며 받아쳤고, 6월 24일 휴전이 성립되면서 12일 만에 1차 충돌은 일단 봉합됐는데요. 하지만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란이 갖고 있던 60% 농축 우라늄 약 200kg이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고, IAEA 사찰단도 시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 2026년 2월: 하메네이의 죽음과 두 번째 전쟁

12일 전쟁의 휴전은 길게 가지 못했습니다.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또 한 번 공격하는데요. 이번엔 핵 시설을 때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이란 정권을 갈아엎는 걸 목표로 내걸었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1989년 호메이니 사망 이후 36년간 이란을 통치해온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란은 하메네이의 아들을 후계자로 앉히고, 이스라엘과 중동의 미군 기지, 아랍 국가 안의 군사·민간 시설에 대대적인 보복을 퍼부었죠.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무조건 항복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라며, 협상이 깨지면 이란 에너지 시설과 다리들을 때리겠다고 압박했습니다. 협상 마감일도 3월 21일, 23일, 4월 7일로 계속 미뤘는데요. 이는 미국이 이란이라는 나라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집니다.

 

🛢️ 호르무즈 봉쇄와 발이 묶인 미국

2개월 넘게 이어진 전쟁은 지난달 8일, 불안한 휴전이 이뤄지며 일단 멈춰섰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분위기인데요. 이란이 꺼낸 가장 강력한 카드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닷길이 막히면서 약 2만 명의 선원이 통과를 기다리며 발이 묶였고, 미국 평균 휘발윳값은 갤런당 4.45달러까지 치솟았습니다. 전쟁 전에 비해 약 50% 오른 수준이죠. 

전쟁 초기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만만했습니다. 3월 1일 NYT 인터뷰에서 "필요하면 4~5주간 공격을 지속하겠다"라며, 1월에 단행된 베네수엘라 마두로 축출 작전을 "완벽한 시나리오"라고 자랑했는데요. 4월 16일에도 "이란이 거의 모든 것에 동의했다"라며 전쟁이 곧 끝날 것처럼 말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의 군사 시설을 부수고 하메네이까지 제거했지만, 정작 이란 정부는 멀쩡히 살아남아 호르무즈 봉쇄 카드를 휘두르고 있는데요. 이처럼 전쟁은 2달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고, 미국 국방부의 추산에 따르면, 전쟁 비용으로 250억 달러(약 36조 8천억 원)가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죠. 이는 작년 미국 정부 셧다운의 핵심 쟁점이던 오바마케어 보조금 확대 비용과 맞먹는 규모입니다. 여기에 호르무즈 봉쇄로 인한 유가 폭등과 물가 상승까지 더해지며 미국 내 반전 여론을 자극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불리한 상황이 되고 만 것입니다.


미국과 이란의 70년 악연은 결국 두 차례의 직접 전쟁으로 폭발했습니다. 1953년 쿠데타로 심어진 불신, 1979년 혁명과 인질극, 2018년 핵 합의 파기까지 한 번도 풀린 적 없이 차곡차곡 쌓여온 갈등이 임계점을 넘은 결과죠. 미국은 이란의 핵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입장이고, 이란은 핵이야말로 외부 공격에서 살아남을 마지막 보험이라는 입장인데요. 두 입장 사이의 거리는 2015년에도, 2025년에도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이란의 핵무기를 가져야 살아남는다는 인식은 더 강해졌고, 다른 중동 국가들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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