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한입] 삼성가 삼부자, 이병철·이건희·이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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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한입] 삼성가 삼부자, 이병철·이건희·이재용

(썸네일 출처: Wikipedia Commons)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시청률 24.9%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면서 드라마 속 순양그룹의 진양철 회장의 모티브가 된 삼성그룹 고(故) 이병철 회장에 관한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진양철 회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병철 회장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심한 경상도 사투리와 뿔테 안경, 깔끔하게 넘긴 헤어스타일 등 이병철 회장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왔죠. 요리사에게 초밥 속 밥알의 개수에 대해서도 조언하며 완벽을 추구했던 이병철 회장의 유명한 일화도 드라마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 연합뉴스

IMF, 닷컴버블 등 수많은 굴곡을 거치고 한국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엔 삼성의 역할이 컸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삼성은 무노조 경영, 불법 승계 등 논란을 몰고 다니며 공분의 대상이 되기도 했죠. 여러모로 한국에서 삼성은 애증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번 <인물 한입>의 주인공은 삼성그룹의 총수 세 사람, 바로 이병철, 이건희 그리고 이재용 회장입니다.


26세 한량이 ‘돈병철’이 되기까지

이병철 회장의 별명은 돈병철로 알려져 있는데요. 한국에서 부자 하면 이병철 회장을 연상할 만큼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이죠.

  • 1910년 경주 이씨 양반가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병철은 변변치 않은 일을 전전하다가 1936년, 26세의 나이에 첫 사업에 뛰어듭니다. 아버지에게 지원받은 토지를 바탕으로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창업했는데요. 이후 1938년, 대구 서문시장에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제분업과 제면업, 과일 유통 무역으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1939년에는 조선양조까지 인수하고 양조업에도 진출합니다.
1938년 대구에 설립한 삼성상회 ©호암재단
  • 이후 이병철은 자본도, 기술도 부족한 상황에서 유일한 사업적 돌파구가 무역업에 있다고 판단하고 본격적으로 국제무역에 뛰어듭니다. 1948년 서울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 국가와 국제무역에 나섰죠.
  • 하지만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모든 재산을 포기한 채 혈혈단신으로 서울에서 탈출해 부산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다행히 조선양조에 축적돼있던 자본금 3억 원으로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설립하고 재기에 나설 수는 있었죠. 이후 이병철은 고철을 수집해 일본에 팔고 그 돈으로 중국에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해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 이병철은 삼성물산 수익을 바탕으로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는 등 사업 확장을 이어갔습니다. 이후엔 비료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당시 한국의 현실에 개탄해 비료공장 설립에 나섭니다. 그렇게 1966년엔 세계 최대 규모인 연 36만 톤 생산이 가능한 한국비료공장을 설립하기도 했죠.
1954년 재일모직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 ©호암재단
  •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면서 전 국민의 공분을 사게 되는데요. 삼성그룹의 계열사 한국비료공업이 일본 미쓰이 그룹과 공모해 사카린 약 55톤을 건설 자재로 둔갑해 한국으로 밀수했다가 적발된 것입니다. 당시 정권과 협의하고 비자금을 조성하려는 목적이었다는 뒷이야기도 있죠. 결국 이 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공업과 대구대학을 정부에 헌납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군사 정권의 눈 밖에 난 이병철은 부정 축재자로 몰려 조사를 받고 대중의 심한 비난에 시달렸는데요. 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1964년엔 TBC 동양 방송, 1966년엔 중앙일보를 설립해 언론계에 진출했죠.

반도체에서 미래를 본 이병철의 혜안

  • 한편, 삼성그룹이 전자 사업에 처음 진출한 것은 1968년입니다. 당시엔 전자업계는 물론 정치인들까지 반대하고 나섰죠. 59개 전자 회사로 이뤄진 전자공업협회는 이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사업허가에 어려움을 겪자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나 전자산업을 국가적 사업으로 키워야 한다고 설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결국 그는 1969년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투자에 나섭니다. 그렇게 TV와 VTR(비디오테이프 재생기기) 등 전자 제품을 수출하기 시작하죠.
  • 삼성그룹이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1983년입니다. 그 이전에도 그룹 내 삼성반도체라는 기업이 있었지만, 삼성전자가 요구하는 수준의 부품을 만들 기술이 없었죠. 또한 자체 설계 역량이 없어 시장 개척도, 수익 창출도 힘들었습니다. 결국 1980년 삼성반도체가 삼성전자에 인수되자 이병철 회장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일본 NEC 기업 회장에게 삼성반도체의 문제점에 대해 질문하고 기술 제휴를 요청하는데요. 이러한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상대를 보고 오히려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투자를 두고 크게 고민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80년대 당시, 반도체 설비 라인 하나에 1조 5천억 원 정도가 들었다고 하니 그룹 전체의 운명을 걸고 도박에 나선 셈이었죠. 그의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그가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이 끝나가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라며 “삼성 반도체에 내일을 건다”라고 각오를 다진 것을 볼 수 있죠.
© 삼성그룹
  • 1983년, 이병철 회장은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발표를 통해 그룹 차원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표합니다. 첨단 반도체 공장 건설에 착수하고 5년 동안 시설투자에 4,400억, 연구개발에 1,000억 원가량을 투입해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겠다는 계획이었죠. 당시에는 국내외를 망라하고 부정적 전망이 우세했는데요. 하지만, “3년도 못가 실패할 것”이라는 전망은 삼성전자의 급격한 성장과 함께 보기 좋게 빗나갔죠.

삼성그룹 제2의 창업주, 이건희

삼성그룹의 성장에는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공이 당연히 크지만, 후계자인 이건희 회장도 빼놓을 수 없는 공로자입니다.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역시 이건희 회장이 한국반도체라는 기업을 인수한 이후였죠. 이건희 회장 역시 뛰어난 경영 능력을 발휘해 삼성그룹의 연 매출을 10조 원에서 약 400조 원으로 40배 가까이 늘리기도 했는데요.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그룹의 제2의 창업주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는 이유입니다.

  • 1942년 대구에서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이건희는 일본에서 자라 부모님과 자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탓인지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고 알려졌죠. 6·25전쟁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연세대 상학과에 진학했지만. 이내 자퇴하고 와세다 대학 상학부를 졸업했습니다.
이병철 회장(왼쪽)과 유년시절 이건희 회장(오른쪽) ©삼성전자
  • 유학을 마치고 1966년 국내로 돌아온 이건희는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에 입사했습니다. 애초에 셋째 아들로 경영권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없었지만 첫째 형 이맹희과 둘째 형 이창희가 아버지 이병철 회장을 청와대에 고발해 끌어내리려다 실패하면서 이건희에게 경영권이 승계되죠. 그렇게 그는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87년엔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꿔!”

1987년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는 그룹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는 생각에 위기의식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라며 신경영 선언에 나서죠.

회장 취임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 이듬해 삼성그룹 창업 50주년을 맞아 삼성의 제2창업을 선언한 그는 위로부터 적극적인 혁신을 시작합니다. 1988년은 국내 최초로 개발한 휴대전화를 시장에 선보인 해이기도 했는데요.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라며 휴대전화를 미래 먹거리로 지목하기도 했죠.
  • 그러나 무리한 제품출시로 삼성 휴대폰 불량률은 11.8%까지 치솟았는데요. 삼성전자 휴대폰을 판매한 대리점 사장이 고객에게 뺨을 맞는 사건이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죠. 이에 크게 격노한 이건희 회장은 1995년 삼성전자 경북 구미사업장에서 애니콜 화형식을 지시했습니다. 시중 제품을 모두 회수에 불태우라고 지시한 것이죠. 이건희 회장의 말 한마디에 총 500억 원어치의 휴대폰이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이 사건 이후 불량률은 2%대로 떨어졌습니다.
1993년 신경영 구상을 설명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 이건희 회장은 이듬해 디지털 방식의 휴대폰을 독자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휴대폰을 비롯한 전자제품 수출에 매진합니다. 전자 제품 품질 개선과 기술 혁신에 매달리면서 세계 최초로 TV폰, 천만 화소 카메라 폰을 내놓는 성과를 보였는데요. 굴지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됐죠.
  • 디자인에 대한 강조로 글로벌 삼성에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미래엔 휴대폰이 성능이 아니라 디자인으로 성패가 갈릴 것을 예상하고 1990년대 삼성의 디자인 혁신을 지휘하기도 했죠. “고객이 제품에 마음을 뺏기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0.6초인데, 그 짧은 순간에 사로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라는 이건희 회장의 말은 디자인에 대한 그의 신념을 보여줍니다.

이재용 삼성의 미래는?

이재용 회장(왼쪽)과 BMW 올리버 집세 CEO(오른쪽) ©삼성전자

올 10월,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 회장으로 승진했는데요. 2014년 경영 전면에 나선 지 약 8년 만입니다.

  • 2014년 부회장으로 취임하기 이전엔 그의 경영 능력에 대한 불신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2000년 33세의 나이로 인터넷 벤처기업 e삼성을 창업하면서 국내외 IT 벤처기업 투자에 나섰지만, 닷컴버블이 꺼지면서 큰 손해만 봤기 때문인데요.
  • 2014년 이건희 회장이 갑작스럽게 쓰러지면서 경영 일선에 나선 이재용은 부회장에 취임하자마자 삼성테크윈 등 방산 부문 계열사들을 한화에 매각하며 선택과 집중에 나섰습니다. 또한 SmartThings, 하만 등 수조 원 규모의 투자를 거침없이 지시했죠.
  • 2021년 삼성전자는 280조 원가량의 매출을 기록하면서 최고 매출 기록을 갈아치웠는데요. 이재용 회장이 삼성의 새로운 전성기를 이끌고 있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2020년 대국민사과에서 이미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을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기업으로 만들겠다고 밝히면서 무노조 경영이나 불법 승계 문제도 해결할 의지를 보였죠.

그러나 최근 미국 연준의 긴축 정책과 반도체 불황, 스마트폰 판매 부진 등 악재가 겹치면서 삼성전자의 앞날에는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이에 이재용 회장 체제는 비상 경영 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하며 긴축 경영에 나섰죠. 무노조 폐기 원칙 등 이재용 회장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오는데요. 과연 이재용의 삼성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뤄놓은 삼성그룹을 잘 지켜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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