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넘는 방식: 변화와 본질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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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넘는 방식: 변화와 본질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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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 한입2026-05-02

1. 반전의 순간

과학의 발견, 전쟁의 판세, 스포츠 경기의 승패에는 흐름이 한 번에 뒤집히는 순간이 있습니다. 오랜 정체 끝에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패색이 짙던 경기가 뜻밖의 계기로 역전되기도 하죠. 기업의 성장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공한 기업 가운데 상당수는 처음부터 순탄한 길을 걸어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느 시점에 성장의 한계와 위기의 신호를 정면으로 마주한 사례가 더 많은데요. 대표적으로 1997년의 애플은 복잡한 제품 라인업과 지속된 적자로 파산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있었고, 넷플릭스는 2011년 DVD 대여 사업을 분리하고 스트리밍에 주력하는 과정에서 주가가 석 달 만에 70% 넘게 폭락하기도 했죠.

이들은 이런 순간에 숨겨진 모멘텀을 발굴해 재도약의 지렛대로 삼았습니다. 오늘은 위기를 넘긴 기업의 선택을 통해, 변화와 본질 사이의 균형점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2. 확장이냐, 전환이냐

기존 사업이 포화하고 경쟁자들이 따라붙을 때, 기업은 보통 크게 두 갈래 길을 선택해 왔습니다. 사업 범위를 넓히는 확장, 또는 아예 방향을 트는 전환이죠.

 

1️⃣ 아마존, 자체 확장(Organic Growth)의 교과서

1990년대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한 아마존은 전자제품·의류·생활용품으로 카테고리를 넓히는 과정에서 내부 IT 인프라가 심각한 병목이 됐습니다. 제프 베조스 아마존 CEO는 이를 API 명령을 통해 표준화하며 해결해 나갔는데요.

API 명령: 한 소프트웨어가 다른 소프트웨어의 기능이나 정보를 호출하기 위해 정해진 규칙(API)에 따라 보내는 요청을 말합니다. 사람이 직접 화면을 클릭하지 않아도 프로그램끼리 자동으로 데이터를 주고받거나 특정 작업을 수행하게 할 수 있어, 시스템 연동과 자동화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도약은 이렇게 구축한 내부 인프라 역량을 외부에 판매한다는 역발상에서 나왔습니다. 이커머스를 위해 고도화한 서버 인프라를 클라우드 서비스로 상품화한 아마존웹서비스(AWS)는 현재 아마존 전체 영업이익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고 있죠. 이는 향후 물류 서비스, 광고 네트워크와 같은 내부의 시스템을 외부 비즈니스로 확장하는 방식의 시초가 됐습니다.

 

2️⃣ 디즈니, 인수합병으로 콘텐츠 제국이 되다

2000년대 중반까지 자체 애니메이션 부진으로 성장 동력을 잃어가던 디즈니는 2006년 픽사(74억 달러), 2009년 마블(40억 달러), 2012년 루카스필름(40억 달러)이라는 세 번의 대형 인수·합병(M&A)으로 전혀 다른 회사가 됐습니다. 단순한 외형 확대가 아니라 각 기업의 IP, 팬덤, 제작 역량이 디즈니의 배급·테마파크·상품화 시스템과 결합하며 폭발적인 시너지를 낸 거죠. 픽사 없이는 <겨울왕국>도, 마블 없이는 디즈니플러스의 초기 흥행도 없었을 겁니다.

인수·합병(M&A): 인수(Acquisition)와 합병(Merger)을 합쳐 부르는 말입니다. 인수는 A 기업이 B 기업의 주식을 사들여 B 기업의 대주주가 되는 방법이고, 합병은 A 기업이 B 기업을 전부 사들여서 하나의 회사로 합치는 방법이죠.

 

3️⃣ 후지필름, 사업을 통째로 갈아엎다

2000년대 초 디지털카메라의 부상으로 사진 필름 시장이 붕괴하면서, 후지필름은 주력 매출의 60%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후지필름은 필름 제조 과정에서 축적한 기술로 눈을 돌렸는데요. 필름 변색을 막는 항산화 기술은 피부 노화를 방지하는 화장품 기술과 본질적으로 같았고, 주원료인 콜라겐을 다루는 기술은 헬스케어 분야와 직결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화장품·바이오·제약으로 사업을 전환해 현재 후지필름은 글로벌 CDMO 강자로 자리매김했죠.

CDMO: 제약·바이오 기업으로부터 의약품의 개발과 위탁 생산을 함께 의뢰받아 수행하는 전문 기업을 의미합니다. 단순 생산만 맡는 CMO와 달리 공정 개발, 임상 시료 생산, 상업화 단계까지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신약 개발사 입장에서는 자체 생산설비 투자 없이 빠르게 제품화에 나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4️⃣ 더 큰 미래를 택한 넷플릭스

DVD 우편 대여로 성장하던 넷플릭스는 미래 콘텐츠 산업의 중심이 온라인 스트리밍이 될 것이라는 신호를 먼저 읽었습니다. 당시에도 기존 사업이 현금을 만들고 있었지만, 내부에서는 '언제까지 이 모델이 유효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이미 제기되고 있었는데요. 결국 넷플릭스는 안전해 보이는 현재 대신 불확실해 보이는 더 큰 미래를 택했고, 오늘날 이 결정은 산업의 지형을 바꾼 선택으로 평가받습니다.

 

5️⃣ 스타트업의 피벗

스타트업의 세계에서는 초기 사업의 가설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과감히 방향을 바꾸는 사례가 많습니다. 흔히 말하는 '피벗'(Pivot)이죠. 핵심은 실패를 감추는 게 아니라, 시장의 실제 반응에서 더 큰 기회를 발견하는 것이죠.

  • 인스타그램의 전신은 위치 기반 체크인 앱 '버번'(Burbn)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용자 반응이 미지근했는데요. 데이터를 들여다보니 체크인보다 사진 공유 기능 사용률이 압도적으로 높았죠. 이에 창업팀은 나머지 기능을 모두 걷어내고 사진 공유에만 집중하도록 앱을 완전히 재설계했습니다.
  • 트위터는 원래 '오데오'(Odeo)라는 팟캐스트 플랫폼이었습니다. 그러나 애플이 아이튠즈에 팟캐스트 기능을 탑재하면서 시장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죠. 팀은 방향을 틀어 140자 단문 메시지 서비스를 실험했고, 이것이 트위터의 시작이었습니다.

팟캐스트(Podcast): 인터넷을 통해 오디오(또는 영상) 콘텐츠를 구독·다운로드해 원하는 시간에 청취할 수 있는 디지털 방송 서비스를 말합니다. 애플의 'iPod'과 방송을 뜻하는 'Broadcast'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는데요. 라디오와 달리 편성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이 자유롭게 제작·배포할 수 있어 1인 미디어와 전문 콘텐츠 시장의 핵심 채널로 자리 잡았죠. 

  • 유튜브의 원래 이름은 'Tune In Hook Up'으로, 비디오 기반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였습니다. 사용자들이 데이트와 무관한 애완동물·일상 영상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창업자들은 데이팅 기능을 과감히 버리고 모든 종류의 비디오를 공유하는 플랫폼으로 방향을 틀었죠. 

 

3. 재도약에 성공한 기업의 공통점

재도약에 성공한 기업의 패턴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1️⃣ 위기 신호를 일찍 포착했다

넷플릭스는 DVD 우편 사업이 여전히 돈을 벌고 있을 때부터 배송비 구조와 초고속 인터넷 보급 속도, 스트리밍 사용량 추세를 보며 사양 산업이 될 것이라 진단했습니다. 아마존도 온라인 서점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카테고리 확장·물류·수익성의 한계를 일찍 인식해 내부 인프라를 선제적으로 준비해뒀죠.

 

2️⃣ 확장 가능한 핵심 역량이 이미 있었다 

아마존의 서버 인프라와 운영 역량, 디즈니의 테마파크·콘텐츠 상품화 역량, 애플의 디자인·UX 혁신 역량은 모두 다른 분야로 확장 가능한 자산이었습니다. 새 기회를 포착한 동시에, 원래 갖고 있던 역량을 재배치하고 활용을 극대화한 셈인데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신사업으로 점프한 게 아니라, 가진 무기를 새로운 전장에서 다시 휘두른 것입니다.

 

3️⃣ 매몰비용에 집착하지 않았다

넷플릭스는 DVD 사업이 자사의 미래가 아니라고 판단해 DVD 구독과 스트리밍 결합 요금제를 분리하고 DVD 사업을 분사했습니다. 애플은 300여 개에 달하던 제품을 유지하는 대신, '전문가용/일반용'과 '데스크톱/포터블'의 2x2 매트릭스 위 핵심 제품 4개에 집중하는 쪽으로 결단을 내렸죠. 단순한 포트폴리오 조정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우선순위 재설정이었습니다.

매몰비용: 이미 지출해 어떤 의사결정을 하더라도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말합니다. 합리적 의사결정에서는 향후 발생할 비용과 편익만 고려해야 하므로 매몰비용은 제외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지금까지 들인 게 아까워서 손실이 예상되는 사업을 계속 끌고 가는 매몰비용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4️⃣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리더의 판단이 있었다

위기는 내부에서 불편한 주제라 쉽게 공론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기업의 리더들은 문제를 덮지 않고 오히려 방향 전환의 근거로 삼았는데요. 2005년 디즈니 CEO로 취임한 밥 아이거는 "지금 디즈니 내부 역량만으로는 최고 품질의 창의적 콘텐츠를 만들기 어렵다"라고 이사회에 숨김없이 보고하고 픽사 인수를 강력히 밀어붙였습니다. 후지필름의 고모리 시게타카 사장 역시 2000년 취임 직후 "본업인 필름이 사라진다"라는 충격적 현실을 공론화하며 전사적 위기의식을 강제로 주입했죠.

 

4. 바꾸지 않고 버틴 기업들

그렇다고 모든 성공이 대전환이나 피벗에서만 나오는 건 아닙니다. 기존 도메인을 더 깊이 파는 심화 전략으로, 끈질긴 개선과 기다림을 통해 결실을 본 기업도 많습니다.

 

1️⃣ 토요타

1950년대부터 저스트인타임(JIT)과 안돈 코드(Andon Cord) 같은 개념을 만들고 수십 년에 걸쳐 심화했습니다. 다른 완성차 업체들이 금융·항공·방산으로 수익을 다각화할 때도 토요타는 제조 혁신에만 집중했고, 결과적으로 경쟁자가 복제하기 어려운 해자를 만들며 글로벌 자동차 시장 정상에 올랐죠.

저스트인타임(Just-In-Time, JIT): 필요한 부품이나 제품을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양만큼만 조달·생산하는 토요타 특유의 재고 관리 및 생산 방식을 말합니다. 재고 보유 비용과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공급망에 충격이 발생하면 생산 전체가 멈출 수 있죠. 

안돈 코드(Andon Cord): 생산 라인의 작업자가 품질 이상이나 이상 징후를 발견했을 때 즉시 잡아당겨 라인 전체를 멈출 수 있도록 설치된 줄 또는 버튼을 의미합니다. '안돈'(行灯)은 일본어로 등불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됐는데요. 줄을 당기면 경광등이 켜지고 라인이 정지돼 문제를 즉각 공유·해결하게 되죠. 

 

2️⃣ 비자(Visa)

수십 년간 결제 네트워크 인프라 운영에만 집중하며 은행(발급사)과 가맹점의 양방향 네트워크 강화에 투자했습니다. 대출·예금 같은 직접 금융 서비스도 검토했지만, 은행의 경쟁자가 되는 대신 은행과의 시너지를 강화하는 길을 택했는데요. 이를 통해 금융 규제와 자본 확충 요건을 피하면서 핀테크·데이터 플랫폼 기업으로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3️⃣ 쿠팡

최근 여러 논란이 있지만, 쿠팡 역시 끈질김의 아이콘입니다. 로켓배송 인프라를 구축하며 수년간 조 단위 적자를 냈고 시장에서는 이러다 망한다는 위기론이 끊이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쿠팡은 '고객은 빠르고 편리한 배송을 원하며, 압도적 물류 인프라는 결국 승자 독식을 가져온다'라는 최초의 사업 가설을 의심하지 않고 밀어붙인 끝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런 뚝심 전략이 통한 기업에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장에서 이미 검증된 핵심 역량과 선점한 지위에 기반한 확신이 있었다는 점이죠. 또 이들이 속한 시장은 단기 트렌드에 휘둘리지 않는, 장기적으로 안정적 수요가 있는 분야기도 했습니다. 피벗이 필요한 기업과 뚝심이 필요한 기업의 차이는 결국 지금 방향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단지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냉철한 진단에서 갈립니다.

 

5.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

AI의 급속한 확산과 글로벌 경쟁 심화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적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산업에서 기존 질서가 흔들리고, 기업은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죠. 그러나 변화 그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됩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현재 사업이 어디까지 왔는지, 무엇이 한계인지, 그리고 그 한계를 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핵심 자산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입니다.

결국 핵심 질문은 '무엇을 바꿔야 하고, 무엇은 끝까지 지켜야 하는가?'입니다. 위기를 성공적으로 넘은 기업은 이 질문에 성급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답을 찾았는데요. 기업의 재도약은 변화할 줄 아는 능력과 버틸 줄 아는 능력,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아는 능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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